역사는 보는 눈(임진왜란을 중심으로) 1/효석 최택만
역사는 보는 눈(임진왜란을 중심으로) 1
역사를 왜곡시키거나, 역사를 너무 과장시키는 일은 둘 다 위험합니다. 역사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면 그 나라는 결국 쇠잔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현대사의 왜곡은 아주 위험 요소가 많습니다.
특히 정치인의 역사 왜곡시킨 예는 독일의 히틀러, 소련이 레닌, 중공의 모택동을 둘 수 있습니다. 그들로 인해 그 나라 국민의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까?
우리는 이런 역사적 교훈을 거울삼사 역사를 보는 시각을 키우고 왜곡된 역사를 시정하는 데 미력하지만 기여해야 할 국민적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임진왜란의 전운이 감 돌자 조선의 조정은 일본의 내부 상황을 탐지하기 위해 첨지(僉知) 황윤길(黃允吉)을 정사(正使)로, 사성(司成) 김성일을 부사(副使)로 일본에 파견했다. (최택만 교수신문 주필)
▼"국가대사 크게 떠들일 아니다"▼
그런데 이들이 귀국해 보고하는 자리에서 황윤길은 전운이 임박했다고 말했고, 김성일은 가히 걱정할 일이 못된다고 보고했다. 결국 김성일의 그릇된 보고가 전란의 참화를 불러일으켰으니, 김성일은 역적이라는 것이 종래 교과서의 일관된 논조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 당시의 정황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선조(수정)실록’(24년 3월 1일 정유 조)과 ‘징비록(懲毖錄)’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건의 내막은 다음과 같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에 도착한 것은 1590년 4월이었다.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나 업무를 마치고 돌아올 즈음 일본 측이 국서(國書)로 회신해야 하는데도 이를 내놓으려 하지 않자 김성일은 그것이 국례(國禮)에 어긋난다 하여 3일을 기다린 후 국서를 받아냈으며, 받은 국서가 무례하자 보름을 기다린 끝에 내용을 고쳐 이것을 갖고 이듬해인 1591년 조선으로 돌아 왔다.
귀국한 후 어전에서 황윤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안광이 빛나며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 했고, 김성일은 “히데요시란 인물은 두려워할 인물이 족히 되지 못 한다”고 왕에게 아뢰었다.
그 자리를 물러 나와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이 김성일에게 “그대가 황윤길과 다르게 말하는데, 만약 병화가 있게 되면 어찌 하려고 그러는가?” 하고 물으니, 김성일이 대답하기를 “저도 어찌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단정했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 주려고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위의 문헌으로 미루어 보건대 일본군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김성일이 어전에서 보고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의 발언은 결코 진심이 아니었다. 그는 더 깊은 데를 생각하고 있었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 과정에서 김성일이 정직하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으며, 그런 점에서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바랐던 것은 민심의 안정이었으며, 전쟁과 같은 국가 대사는 알 만한 사람끼리 알아서 처리할 일이지 여럿이 모여 크게 떠들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두 사람의 상반된 견해를 최종적으로 판단했어야 할 선조의 무능함에 어쩌면 더 큰 책임이 있는지도 모른다.
신봉룡 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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