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눈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2/효석 최택만
역사를 보는 눈(임진왜란을 중심으로) 2
▼진심 알고 공직에 다시 임명▼
그러나 막상 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왜군이 쳐들어오지 않 으리라고 보고한 김성일을 괘씸히 생각하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그를 옥에 가두도록 명령했다.
그때 그의 진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유성룡이 왕에게 간곡히 아뢰어 김성일은 하옥을 면할 수 있었다. 하옥 명령이 떨어졌을 때 김성일은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경상감사 김수(金쉛)에게 적을 막을 방책을 일러주는 모습을 보여 하자용(河自溶) 같은 이는 “자기 죽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 일만을 근심하니 이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충신이다”라고 말했다.(유성룡의 ‘징비록’ 상)
그후 김성일의 진심을 안 선조는 그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에게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의병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하는 직책)를 제수하여 왜병을 막는 데 힘쓰도록 당부했다.
김성일은 죽산(竹山)과 함양(咸陽) 등에서 격문을 돌리고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등의 도움을 받아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키면서 군정(軍政)에 노심초사했으며, 역질에 걸린 백성들을 돌보다가 전염되어 진중에서 죽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사사로운 일을 말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 혁이 함께 병중이었으나 한번도 돌보지 않았다.
훗날 같은 인물, 같은 사안을 놓고 두 사람이 어찌 그리 다른 보고를 했는가에 대하여 의혹을 떨칠 수 없었던 선조는 신임하던 동지사(同知事) 이항복(李恒福)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이항복의 답변에 따르면, 어전에서 그런 논의가 있은 후 이항복은 김성일과 함께 궁궐안을 거닐면서 왜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고했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답변하기를, “남쪽의 인심이 동요되는 것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항복은 이런 연유를 선조에게 아뢰면서 김성일의 진심은 여럿이 모인 자리인지라 불필요하게 불안을 조성할 소지가 있어 사실과 다르게 말씀드린 것이라고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이항복의 말을 듣고 있던 좌중의 대사헌 홍진(洪進)은 김성일이 살았더라면 진주성이 함락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아뢰었고, 임석했던 사관(史官)은 김성일이야말로 진실로 유직(遺直·마음이 곧은 옛 사람의 기풍이 남아 있음)이라고 기록했다.(‘선조실록’ 28년 2월 6일 을유 조)
▼황윤길 후손이 죄인으로 단정▼
이와 같은 전말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한국사학사에 들어오면서 김성일은 임진왜란이라는 참화를 유발한 역사의 죄인으로 기록됐다.
이러한 논지를 최초로 편 학자는 황윤길의 문중 후손이었던 황의돈(黃義敦)이었다. 일제시대에 중등학교 국사교과서를 편찬했고 해방 후에는 동국대에서 국사학을 연구한 한국사학의 1세대 학자인 그는 ‘신편 조선 역사’(이문당·1923)를 쓰면서 황윤길은 정직한 지사였던 반면 김성일은 죄인이었다고 단정해 기록했다.
한 역사적 인물의 행적은 그의 진심과 동기를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비롯해야 하며, 그의 진심은 그가 마지막 생애를 어떻게 마쳤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김성일은 신중한 애국자요, 충신이었지 결코 의롭지 않게 거짓을 말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문중 사학의 희생자였을 뿐이다.
신봉룡 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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