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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의 취재(取材) 실화/저자 최택만

봉은 2020. 3. 13. 08:24

언론인의 취재(取材) 실화

 

서문

 

청년은 꿈을 먹고 살고, 노인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필자도 추억을 그리며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해서 추억의 그늘에서 침잠하는 삶은 아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글을 쓰고 사는 삶을 선물한 것이 바로 내 직업, 언론인이라는 직함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1964년 상경계 대학을 졸업하고 1965년 2월 8일 서울신문사에 입사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사와 경제논평을 쓰는 평생직장을 얻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제1부

수습기자 시절

 

신문사 수습기자 시험에 합격하면 견습 기자가 된다. 수습기긴 6개월 동안 기자로서의 소양, 취재방법, 출입처 기자의 활동 상황 등을 교육받게 된다. 일반 직장처럼 교실에서 이런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받는다.

 

내가 수습기자 시험에 합격하여 출근 한 것은 65년 2월 8일. 그 해 공채로 합격한 수습기자는 11명(응시자 900여 명)이다. 우리는 공교롭게 공채 11기(期) 인데 11명이었다. 제일 먼저 출근 한 곳은 편집국이다. 첫 인상은 한마디로 "시끄럽다" 이다. 마치 시골 장터를 연상케 했다.

 

원고를 마감하게 되어 있는 11시가 가까워지면 시골장터의 저녘 떨이 때를 방불케 한다. 바깥에 있는 기자가 건 전화소리, 안에 있는 기자가 "왜 기사를 않보내느냐" 호통치는 소리, 독자들의 신문기사에 대한 항의 전화 소리가 엉켜 난장판이다.

 

기사를 받는 내근 기자와 밖에서 기사를 부르는 기자 간에 주고 받는 소리가 이상하게 들린다. 기사의 사람 이름은 한자로 부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신참 기자는 한문을 잘 모른다.

 

일례로 조아무개를 부르면서 "나라 조(趙)"자를 라 요즘 잘나오는 조병옥(趙炳玉) 한민당 대톨령 후보 이름을 빌려 조병옥 조(趙)자라고 는가 하면 모택(澤)자를 모택동 택자로 설명하며서 부른다.

 

그러니 더 시끄러울 수 밖에 없다. 지명까지 한문으로 불러야 하니 온갖 방이 다 동원된다. 게다가 신참 기자는 기사를 잘못 쓰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런 때는 고참 내근 기자가 "기사 좀 똑똑히 불러"하고 고함을 지른다.

 

그렇지 않아도 쥐늑이 든 새내기 기자(수습기자 포함)는 그 소리에 겁이나 금 전보다 더 기사를 못부르는 수도 있다. 지금이야 이메일로 송고를 하니그런 문제는 없다.

 

나도 그런 곤혹을 수 없이 당했다. 고참 기자가 퇴근때 한잔 사면서 "그렇게 해야 기자가 되는 거야" 하며 위로겸 충고겸하는 말을 들을 때 비로소 얼었던 마음이 풀린다고 했다.

 

술에 약한 편이어서 화장실을 다녀오는 척 하면서 약국으로 달려가 꿀탑이라는 위산제와 술깨는 약을 잔득 사먹고 몇개는 갖고 가서 먹지만 취기는 점점 달아오른다. 수습기자들이 골아 떨어지면 신문사 근처 여관으로 대려다 놓고 방값까지 지불하고 간다

"의리"라는 점에서는 죽여준다. 다른 직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의리다. 아침에 해장국 한 그릇하고 출근하면 선배들이 먼저 와 있기 일쑤다. 참 부지런 한 사람드이다.

 

 

사회부는 다른 부에 비해서 바쁜다. 그때는 유난히 연탄 사고로 숨진이가 많았다. 서울시 경찰청에 출입하는 팀장한테서 오는 전화(유선 직통)을 받으면 사망자 명단과 주소를 불러주면서 찾아가 사망자 사진과 가족 관계를 취재오라고 지시한다.

 

삼양동 산 번지나 금호동 산 번지는 한 번지에 몇채의 집이 있다. 문패를 보고 겨우 찾아가면 먼저 온 신문사나 방송사 기자가 사진을 몽땅 갖고 가벼렸다.빈손으로 회사에 가면 선배가 호통을 친다.

 

풀이 죽어 쪼그리고 있으면 전화 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으면 선배 기자가 기사를 부른다. 빨리 받지 않는다고 닥달이다. 참 고달프다. 나중에 알았지만 강훈련은 수습 기자를 기자로 기르는 방법이라고 한다.

 

 

금주령

 

편집국 각 부 순환 근무를 하면서 각부의 특징을 알게 되었다. 정치부는 기자들 한테서 정치인 냄새가 풍긴다고나 할까, 경제부는 은행원, 사회부는 경찰, 문화부는 문인의 체취가 풍겼다.

 

정치부 기자들은 할말만하는 편이고, 경제부는 조용조용 말했고, 사회부는 좀 목소리가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각 부의 특성을 음미하면서 업무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그 탓인지, 각 부의 선배들로 부터 듣기 싫은 애기는 듣지않았다.

 

나는 사회부 근무 때 한 선배로 부터 사회부장이 "당신을 잘 훈련시키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여자 선배는 나보다 2년 선배로 활달했고 남자들 보다 취재를 장해서 사내에서 인기가 있었다.

 

사회부장은 면접 때 나에게 만약 합격하면 경제부와 사회부 운데 어느 부에서 근무하고 싶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사회부에서 근무하싶다" 고 말하자 "이유가 무어냐"고 되물어 "서민생활을 알고 싶어서 라"고 대답한 바 있다. 나는 그 선배 애기를 듣고 사회부장이 선배에게 한 말이 이해가 갔다.

 

회부장의 말로 미루어 나는 6개월 수습기간이 끝나면 사회부에 배치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수습 동기생 모두 기자 훈련을 위해서는 사회부가 좋다는 말을 듣고 있어 사회부 배치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듯 했다.

 

어느 부에 가나 저녁에 술먹기는 똑 같았다. 그렇게 술을 먹다보니 동기생들 일부는 지쳐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밤 술먹고 회사로 들어가던 동기생 한 명이 국이 있는 3층으로 걸어 올라 가다가 미끄러져 크게 다친 사건이 발생했다. 행이 머리는 다치지 않아 병원에 며칠 입원했다가 퇴원을 했다.

 

이 사건이 나자 편집국장이 우리들에게 한달동안 금주령을 내렸다, 그리고 들에게도 수습기자들에게 술을 사 주지 말라고 엄명을 했다. 나는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싶었느나 술을 잘 먹는 동기생 몇명은 못내 아쉬워했다.

 

 

첫 특종기사

 

1개월동안 편집국내 각부 순환근무가 끝나니 전원 사회부로 집합이다. 속전속결의 수습기자 훈련이 목표다. 사회부 사건담당 차장(데스크)이 수습기자 전원에게 경찰서 취재를 명령했다. 한 사람이 서울 시내 경찰서 한군데를 담당한다.

 

나는 서울역앞 남대문 경찰서 출입을 명받았다. 그 당시는 조선 서울 등 7개 신문사 기자가 경찰서에서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다른 신문사 기자는 나보다 6개월에서 1년정도 먼저 경찰서 출입을 해 제법 기자 행세를 하는 것 같았다.

 

수습기자인 나도 그들처럼 형사실 등 이방저방을 돌아다니다가 서장실에 가니 여비서가 없고 방은 비어있다, 점심시간이라 식사를 하러 간 것 같았다.서장 집무실에 들어가니 무슨 차트가 걸려있었다. 내용을 보니 마약밀수단 계보와 국내 판매책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되어있었다.

 

주머니에서 취재수첩을 커내 정신 없이 베끼고 난뒤 그 방을 나왔다.이마에서 땀이 주르르 흘렀다. 기자실로 와 마음을 진정시키고 형사반장에게 가 우리 회사에 마약밀수단 제보가 들어 왔다며 두목이름을 대니 반장은 "그 놈 간도 크다"며 입을 열었다.

 

밀수한 마약이 무려 100억을 넘었다. 그리고 서장을 만나 똑같은 방벙로 취재를 좀 하는 척 했다. 결국 두 사람한테서 취재를 한 것으로 둔갑을 시켰다. 휫바람을 불며 회사로 와 사건담당 데스크에게 말하니까 큰 사건이라며 빨리 쓰라고 했다.

 

두서없이 써내자 사건담당데스크는 눈깜작할 사이 엄청난 기사로 둔갑시킨 뒤 내일 사회면 특종기사로 쓰겠다고 했다. 나는 다음날 보충취재를 해 전화로 불러 주었다. 고참기자가 사회면 톱기사로 출고되었다고 했다.

 

최택만 대한언론 논설위원, 전 서울신문 논설고문

 

발깍 뒤집힌 경찰서와 기자실

 

오후 12시 30분에 나오는 우리신문 사회면을 보자 내가 쓴 기사가 톱으로 실려있었다. 제목이 " 100억대 마약 밀수" 커다랐다. 어렵지 않게 쓴 기사가 톱이라니 내 가슴이 덜렁덜렁 뛰었다.

 

기사가 나간 뒤 경찰서가 발깍 뒤집혔다. "어떻게 1급 비밀문서가 기자에게 자세히 흘러 나갔느냐"는 것이다. 서장은 자기가 몇마디 밖에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형사과장 역시 몇마디 했는데 이렇게 자세하게 신문에 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하여튼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고, 다른 경찰관들은 "나는 그런 기사 준 일이 없다"며 면피하기에 급급했다. 형사과에는 1급 문서유출 경위를 조사하는 전답반까지 생겼다. 그러나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느니 조사는 아무런 진전이

있을 수가 없었다. 상급기관인 경찰국에서도 그 경위를 묻는 전화가 빗발치는 것 같았다.

 

다른 신문사는 신문사대로 난리가 났다. "그렇게 큰 기사를 왜 빠트렸느냐"고 남대문 출입기자에게 호통을 치며 따진다. 그 당시 각 신문사는 경찰서 기자실에서 전화를 돌리면 사회부에서 받는 직통전화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신문 저 신문사에서 전화가 와 기자실은 전쟁이 난 듯 했다.

 

기자들이 서장실에 올라가 "어떻게 서울신문에만 기사를 주었느냐"며 항의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서장이 나를 보자고 해서 서장실로 가니까 나한테 "어 기사를 썻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취재원 보호를 위해서 말할 수 없

다"고 했다. 실제로 기자는 취재원 보호를 생명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시간이 가니까 조용해 지는가 싶더니 타사 기자들이 무슨 꿍꿍이른 부리는 것같았다. 내가 기자실에 들어가면 떠들고 애기하던 것을 멈추고 아무말도 하지않는 것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느꼈다. 그 날이후 기자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다른 신문사 기자들의 보복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석간신문 기사를 보니까 일제히 '억대 도박단 검거"라는 기사가 났다.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자기들 끼리 기사를 취재하여 나만 빼고 신문에 실은 것이다. 이런 케이스를 '독구 넣기'라고 한다. 혼자만 기사를 빠트리는 낙종(落種)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사건담당 데스크 한테 '혼이 나겠구나" 하고 저녁 때 회사에 들어갔다. 왠걸, 데스크는 기자들이 더럽게 작땅한 것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취재나 해서 "좋은 기사나 쓰라'고 했다. 오히려 용기를 붙돋아 주었다.

 

앞으로 6대 신문사를 상대로 취재경쟁을 해야한다. 타사 기자 6명과 싸우려면 출퇴근 시간도 아껴야하기에 나는 경찰서 뒷동네 어느 집에 하숙을 들었다. 저녁 때 신문사에 만 잠간 들였다가 남대문 경찰서로 되돌아 와 경찰서에 상근하다시피 하면서 기사를 취재했다.

 

이렇게 되니 서울시 경찰국에 나가는 나의 직속 상관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그 기자를 우리는 시경캪(Cap)이라고 부른다. 시경캪이 움직이나 우리 신문의 다른 경찰서 동기생도 나를 도아주기 위해 뛰었다.

 

취재전쟁은 확대일로를 거듭했다. 시경캪은 남대문서에서 시경으로 올라오는 보고를 모조리 읽어보고 기사가 될만한 것은 나에게 알려주었다. 다른 동기생들은 남대문서에서 수배하는 범죄자 이름을 알아내어 나에게 알려주었다. 서울신문 경찰팀이 총동원된 취재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다른 신문사와 치고 받는 취재전쟁이 1개월 정도 계속되었다. 이렇게 되니 남대문경찰서가 간접 피해자가 되는 상황이 나타났다. 왜냐면 남대문서의 비리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니 남대문서가 우리의 싸움을 말리는 중재자가

되었다. 시경국장과 남대문 서장이 직접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기사전쟁을 중단해 달라고 부탁. 가까스로 싸움을 끝내기로 회사간 합의가 되었다.

 

제2부 해외 연수 

 

개체 속에서 진리탐구 자세

 

대학 캠퍼스의 일들은 모든 이들에게 아름답고 그리운 것으로 남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생활을 전설처럼 미화하고 싶은 충동이 깊어지기까지 한다. 20년 만에 다시 돌아간, 그것도 이국의 캠퍼스 생활은 기자에게 야구의 안타하나 없는 삼진의 연속이었지만 많은 사연들이 기억 속에 자리잡는 것은 바로 대학이 풍기는 지(知)와 미(美)의 까닭이 아닌가 한다.

 

지금쯤 미국인디애나 대학교 블루밍톤 캠퍼스의 하늘은 더 없이 드높고 곧게 뻗은 숲은 오색으로 채색되어 그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기자가 관훈클럽 신영언론기금의 장학혜택을 받아 블루밍톤시에 도착, 여장을 푼 것은 1983년 6월 17일. 섭씨 36~37도를 맴도는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밀림을 방불케 하는 수목속에 자리잡은 캠퍼스는 한더위를 씻어 주었다.

 

캠퍼스뿐 아니라 도시 전체가 깨끗하고 조용한데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고 학원도시 특유의 풍치가 짜릿한 흥분마저 자극했다.

 

학생들에 대한 첫인상도 출국 전의 연상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명상보다는 행동과 감정을 통해 자기발견을 추구하는 1960년대의 학생들이 아니었다. 반전등 학생운동에 몰입했고 거기서 행복과 일체감을 발견했던 그들 선배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개체 속에서 진리를 탐구하려는 진지한 자세가 물씬했다. 그래서 이 학원도시가 ‘침묵이 흐르는 대하(大河)’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지도 모른다. 이국의 상아탑 속에서 느낀 이러한 관객적 생각이 빙점으로 냉각되기 시작한 것은 컴퓨터에 의한 수강신청 때부터였다.

 

마이크로 혁명의 물결이 대학가에도 깊숙이 파고들어 인디애나 대학은 수강신청, 등록금 납부절차 등이 거의 기계화되어 있다. 학번순서에 따라 컴퓨터 등록센터 입장시간이 배정되어 있고 이 시간에만 수강신청을 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강의실에서 만난 언어 장벽

 

동양계 학생들은 대부분 언어의 장벽에 부딪친다. 나는 이 벽 때문에 한 학기를 고전해야만 했다. 미니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를 강의실에 들고가 녹음을 한 뒤 집에 돌아와 강의내용을 다시 듣자니 항상 시간에 쫓기는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랭귀지 코스를 거친 다음 대학원의 강의를 듣는 것이 효율적일 것 같다는 생각을 지금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연수기간이 1년으로 한정되어 있어 상당 기간을 언어 코스에 매달리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인디애나 대학의 경우 외국 유학생은 첫등록 전에 영어테스트를 받게 된다. 남미쪽 학생들은 듣기와 말하기가 동양계보다는 좀 나은 편이다. 반면 동양계 학생은 리딩과 문법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다. 결과적으로 총점수는 동양계 학생들이 라틴계 학생들보다 높게 받으나 강의실에 들어가서는 정반대의 형상, 즉 꿀먹은 벙어리가 되기 일쑤다.

 

우리가 받은 영어교육이 산 영어교육이 아니라는 비판을 그대로 입증하는 것이다. 영어테스트에서 성적이 나쁜 부문은 의무적으로 수강하라는 학교측의 반강제적 권유가 있다. 이 과목을 이수한다 해도 학점이 인정되지 않는다. 다른 미국대학에서 2년 이상 공부한 학생마저 시험을 잘못봐 회화과목을 수강한 사례도 있었다.

 

우리 유학생들이 겪는 이 듣기․말하기 곤욕을 최소화하는 것은 앞으로 유학의 주요과제라 여겨진다. 어느 문화재단이 유학원을 설립, 유학이 확정된 학생들 가운데 희망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3~6개월간 언어무료교육을 집중적으로 펼칠 수는 없을지 막연한 생각을 해 본다.

 

이러한 언어코스 과정은 유학생들의 학위취득 과정을 단축시켜 줄 뿐 아니라 외화절약에도 적지 않게 기여하지 않을까 한다. 한 학생이 박사 코스를 거치려면 평균 5년의 기간이 소요되는 것을 전해지고 있다. 만약 언어의 갭으로 고전하는 1년여 기간을 단축할 수만 있다면 어림잡아 한 학생의 1년 학비 1만 5천~2만달러의 외화송금을 줄일 수 있지 않나 하는 시산(試算)이 나올 수 있다.

 

기업산하 문화재단에서 본다면 이러한 언어교육 서비스는 기업의 사회환원의 한 방안이 아닐까? 인재양성에 기여하는 한편 요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재벌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제3부 중견기자 시절

 

 

수습기자 시절의 감동

 

글과의 인연은 수습기자로 들어가 며칠 되지 않아서 생겼다. 수습기간 동안 모든 수습기자는 하루하루의 일지를 써서 이목우 편집 부국장에게 내게 되어 있었다. 나는 입사해서 열흘 뒤인 2월 18일에는 쓸만 한 것이 생각나지 않아 인촌 김성수 선생 이야기를 써 부국장에게 제출했다.

 

오늘이 인촌 10주기여서 선생을 추모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인촌 선생님이 세운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했기에 어느 정도 그분의 민족관과 교육관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중앙학교는 일제 시절, 신정 때 학생들에게 창호지에 인절미을 싸 주었다고 한다. 학생들은 "다른 학교는 모찌(단팥이 들어 있는 빵)를 주는데 우리는 왜 맛없는 인절미를 먹어야 하느냐"며 불평하는 학생들에게 "곧 이 뜻을 알 날이 올 것이라"는 일화를 담은 글 이었다.

 

당시 다른 학교의 학생들은 일본 제품의 교복을 입었던 데 반해, 중앙학교는 학생들에게 국산인 검은색의 무명교복을 입게 했다는 얘기도 곁들이며 "선생님은 민족의 지도자이자 경세인(經世人)이라"고 평가했다.

 

부국장께서는 인촌 10주기를 맞아 추모기 원고를 외부에 부탁해 놓았는데 편집 마감 시간이 가까워도 도착하지 않자 궁리해 낸 것이 내 일지 글을 그대로 신문에 실으면서 '수습기자 11기 최택만'이라고 써넣었다. 수습기자가 인촌 추모기를 쓴 샘이 되었다. 이런 일은 신문에서 참 드문 일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수습기자 생활 10일 만에 추모사를 쓴 영광을 것을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뿌듯하다. 이렇게 출발한 기자 생활이 무려 34년간 계속되었다.

 

'온정 기사' 특종

 

6개월간 수습기간이 끝나고 기자가 된 필자는 법조계 출입 2진으로 발령을 받았다. 법조 출입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서울지검 백형구 검사실에 들어갔다. 검사 책상에 X레이 사진이 놓여 있었다. 예감이 이상해서 봉투를 열어보니 진정서가 나왔다.

 

제헌국회 부의장 김동원씨 며느리가 자신의 딸을 선처해 줄 것을 호소하는 글이었다. 그 며느리는 시아버지인 제헌국회 부의장 김동원 씨는 6.25 때 납치되어 생사를 모르고 아들은 일찍 사망하고 딸이 있었다. 그 딸이 간호사로 근무하여 벌 어온 돈으로 시어머니(김동원 부의장 처)와 본인 그리고 딸 셋이 근근이 생활했다고 한다.

 

그런데 딸이 특정외래품 중간상의 뀜에 빠져 외래품 몇 개를 사다 팔다가 구속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딸이 폐병에 걸리자 치료비로 보태려고 외래품을 사서 팔다 구속되었으니 자기를 구속시키고 딸을 풀어 달라"는 눈물 어린 내용을 읽는 순간 올쟁이 기자의 마음에 뭉클해졌다.

 

그래서 담당 백 검사에게 "이런 사건은 정상참작을 할 수 없느냐" 고 물었다. 백 검사는 "정상을 참작하겠다"고 밝히고 내일 석방하겠다고 했다.

검사실을 나와 곧바로 사진기자와 함께 영등포에 있는 그녀의 집으로 달려가 자세한 생활형편을 보충 취재했다. 그 다음날 백 검사가 그녀를 석방하고 약식기소하자 '온정기사'를 특종 보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법조 출입 때 나는 세분의 1진을 모셨다. 돌아가신 공하종 선배, 지금도 한 달에 한번 모임에서 만나는 임판호 선배 그리고 현 대한언론인회 회장 김은구 선배다 .

 

법조 출입을 마지막으로 사회부를 떠나 경제부로 옮겨 한국은행을 출입하게 된다. 한은 출입은 경제기자로 크려면 한 번 출입해야할 부서이다. 그 당시는 국책경제연구기관이 없어 한은 조사부가 대행 했다. 덕분에 경제예측, 국민총생산(GNP) 등 경제 기초 기사를 쓰게 되었다.

 

훗날 '도설 한국경제'를 쓰게 되는 산 경제지식을 쌓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경제를 알기 쉽게 이해시키는 방법으로 도설 경제서적이 많이 출판되었으나 한국은 도설로 본 경제 서적이 없는 것에 착안하여 1972년 7월 30일 '도설 한국경제'를 출판했다.

 

초년생 기자를 버서난 시점에서 책을 쓴 것은 나의 기자 생활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그 후 문민경제의 개혁(1993년), 평사원에서 대기업 정상에 오른 사람들(전자책 1993년). 한국 대표급 경영 총수의 비화(전자책 2014년). '혼이 있는 경제각료(2014년)를 저술한 바 있고 헌재 가칭 한국경제 개혁을 위한 고언'을 쓰고 있다.

 

기계화의 충격

 

기자는 항상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선배님들의 충고를 실천하기 위해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지원을 받아 1983년 6월 17일 미국 인디애나 대학 신문대학원으로 연수를 떠난다. 미국대학은 당시 IT 물결이 거세게 일어 대학 수강 신청과 등록금 납부 절차가 거의 기계화되어 있었다.

 

4만여 학생들의 등록에 따는 혼잡을 피하는 한편 인력동원과 등록기간을 최대한 단축하기 위해서 학교 당국이 기계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기자에겐 등록 마지막 날 그것도 끝 시간인 오후 5시 30분에서 6시가 등록 시간으로 배정되었다.

 

전날 신문대학원에서 받은 등록카드를 들고 등록 센터에 들어가 컴퓨터 용지에 수강하고 싶은 4과목(12 학점)의 고유번호를 적어 넣은 다음 컴퓨터 속에 넣었다. 즉시 컴퓨터는 1과목만 수강이 가능하고 다른 과목은 학생이 넘쳐 받을 수 없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강좌안내 팸플릿을 다시 뒤져 3과목을 다시 신청했으나 걸과는 여전히 NO였다. 오후 7시에 수강 신청이 마감되어 시간이 촉박했다. 교직원을 애써 찾아 호소했으나 이들에게도 대안이 없었다.

 

며칠 후 추가 등록(Drop &Add) 때 해당과목의 등록을 취소하는 학생이 있을지 모르니 그때 오라고 헸다. 이때처럼 기계문명이 인간에게 주는 다른 한편의 충격을 피부로 느낀 적이 없다.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른다. 다행히 추가 신청 날 등록은 마칠 수 있었다.

 

연수 중 KAL기 피격사건 취재

 

1983년 8월 31일 0시 5분(현지시각)사할린 근처 해역에서 소련 전투기의 공대공(空對空) 미사일 발사로 대한항공(KAL) 소속 007 점보 여객기가 격추된 사건이 발생했다. 인디애나 대학에 연수 중이던 기지에게 이 사건을 취재하라는 지시가 본사로 부터 왔다.

 

뉴욕 케네디 공항을 이륙한 칼 007기가 앵커리지 공항에서 승무원을 교체한 후 다시 운항길에 올라 캄차카 반도를 거쳐 강릉·서울로 이어지는 로미로 20(R-20) 항로를 운항하던 중 예정항로를 이탈하여 소련 영공으로 들어간 데서 비롯되었다.

 

이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에 피격되어 269명의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민간항공기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무차별 단행한 소련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은 거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용해졌다. 2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피격에 대한 진실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각 신문사가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에는 특파원을 두지 않고 워싱턴에 있는 특파원이 커버하고 있었다. 본사는 이 사건이 발생하자 인디애나에 있는 필자에게 뉴욕으로 가 유엔 본부에서 열리는 유엔 안보리 이사회 회의를 취재해서 송고하라고 지시했다.

 

유엔 안보리회의에서는 미국 측 대표와 소련 측 대표 간에 열띤 논전이 벌어지고 있으나 우리나라 대표는 옵서버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 정식발언권도 없는 형편이었다.

 

회의장 밖에서는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재미교포 뿐 아니라 동구권에서 탈출하여 미국에 정착한 폴란드인 등 외국인도 많이 시위에 참가하여 소련을 규탄했다. 뉴욕 근교에는 폴란드인 촌이 있다. 이들이 KAL 피격사건에 관심을 가져준 것이 고마워서 그곳에 가서 취재를 한 일이 생각난다.

 

이 마을 한 어른은 "분단국인 한국인들의 어려움이 자신들의 일같다" 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열을 동안 KAL 피격 사건을 취재하고 학교에 돌아오니 윌호이트 교수가 "왜 결석을 했느냐"고 물었다. 내가 KAL 피격사건을 취재하고 왔다고 대답하자 강의 시작 전 애도와 만행에 대한 분노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강의실이 숙연했다.

 

스포츠 서울 창간

 

미국에서 1년간 연수를 마치고 84년 8월 말 귀국하여 외신부 부장 대우로 근무하고 있다가 다음 해 4월 스포츠 서울 창간 멤버로 발령을 받게 된다. 기상천외한 교양부장 자리에 앉았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그 당시 이미 일간 스포츠와 스포츠 조선이 발행되고 있었다.

 

공보처는 서울신문에 스포츠 서울 발행을 허가해 주면서 청소년 선도를 위한 페이지를 만들라는 부대조건이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교양부라는 신문사에 없는 부서 명칭이 생겼다. 어느 신문사에도 없는 교양부를 떠맡은 기자로서는 지면을 만드는 하루하루 지옥(?) 같았다. 청소년 선도 특집 며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몇년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외국신문에서 우리 교양부 성격이 맞는 기사를 찾아내려고 국립 중앙도서관을 찾는가 하면 일본 신문을 구독하려 교양부원 전원이 읽게 하려 했으나 일본어를 공부한 부원이 없어서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어 강사를 초빙, 부원들이 저녁 6시부터 1시간 동안 일어 공부를 하도록 했다.

 

그런 노력의 결실을 맺어 모든 부원이 일본신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일어 공부를 마치고 내일 자 조간 1판을 보고 막걸리 집에 가서 한잔하고 헤어지는 것이 하루의 낙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대학을 파고 들어가면서 문제는 조금씩 풀렸다. 우선 "캠퍼스를 찾아서' 라는 특집을 만들어 연재하고 각 대학교 학생 중에서 스포츠 서울 명예기자를 뽑아 교육 시킨 뒤 학교 동정을 쓰게 했다. 대학교 출입기자 제도를 만들어 이들로 하여금 이색 동아리, 신설학과와 향후 전망, 산학협력, 취업 관련 오리엔테이션등 다양하게 취재, 보도하게 했다

 

이렇게 다른 신문에서 흔히 보지 못하는 기사를 다루자 학생들 사이에 스포츠 서울을 보는 학생이 늘어났다. 그 때 스포츠 서울 명예기자로 뽑힌 학생가운데 많은 이가 현재 여러 신문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 당시 교양부 기자들은 지금도 일 년에 두 번 씩 모여 회포를 푼다. 과학기자인 이향순 기자는 천문기상학에 일가견이 있어 여러 번 특종을 했다.

 

대통령 유럽순방 취재 팀장

 

1986년 3월 전두환 대통령이 유럽 4개국 순방에 오른다. 서울신문은 전 대통령의 유럽 순방에 앞서 취제팀을 구성했다. 서울신문은 스포츠 서울에 근무하는 기자가 팀장으로 결정되자 논설위원으로 발령을 냈다. 발령을 받은 다름 날 기자는 사진부 기지와 함께 유럽 4개국 취재에 나섰다.

 

일국의 대통령이 외국 순방에는 여러 분야에서 선발팀이 만들어져 나가는 것을 기자는 처음 알았다, 전직 장관을 비롯해서 군 장성과 경호원 등 선발팀이 대통령 출국 며칠 전 순방국으로 가 상대국 관련 분야 인사를 만나 협력관계를 협의했다.

 

기자는 파리 특파원과 순방국에 유학하고 있는 본사 기자들을 모아 해외특별취재팀을 구성하고 업무를 분담해서 취재활동에 들어갔다. 동시에 대통령이 순방하기 전에 순방국의 언론기관이 한국과 전 대통령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취재하여 본사에 보냈다,

 

또한 기자는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하는 우리 경제인과 순방국 경제단체 간의 회의를 취재하는 한편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 유학하고 있는 서울신문 기자들은 매일매일 기사를 찾느라고 발에 쥐기 날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그 당시 고도성장을 한 결과 순방국들의 한국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전 대통령이 무혈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한국이 경제성장의 모델 케이스로 각광을 받고 있는 때여서 우리를 대하는 각국의 언론기관 인사들이 호의적이었다. 나라가 부강해지면 그만큼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 긍지마서 느낄 수 있었다.특히 벨기에에서는 수행원과 기자도 국빈대우를 받은 기분이었다. 호텔 체류는 물론 차량 편의 까지 제공해 주었다.

 

대통령의 해외순방 취재에서 느낀 또 하나는 각국의 프레스 센터의 전화가 우리나라 전화국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통신상의 편의성이다. 전화 다이얼도 돌리지 않고 수화기만 들면 바로 서울 전화국 교환화원과 연결된다. 수화기를 드니까 우리 교환원이 "안녕하십니까? 무얼 도와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전화 통화가 안돼 기사 송고를 못 해서 애를 태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기자로서 이런 꿈같은 통화를 접하는 순간 들뜬 기분이 들었다. 물론 대통령 순방 기간 특별히 만든 통신망이지만, 국력이 그만큼 신장하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금융실명제 시행의 산파역  

 

순방 추재를 마치고 논설위원실로 돌아 와 보니 이진희 사장이 매일 아침 논설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기자는 '일복'이 터진 탓인지 가는 곳마다 일거리가 많았다. 미국대학 연수 중에 KAL 피격사건 취재, 소포츠 서울에서 신설부(교양부) 설치. 논설위원이 되어서는 매일 사장회의 참석 등 모두 일거리가 많았다.

 

이 사장은 경제기사에 관심이 많아 자신이 일본경제신문을 구독하고 있을 정도여서 '외신경제' 까지 챙겨 가지고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이 사장을 회의가 끝날 무렵 그 날 쓸 사설을 결정하면서 특이한 논설소재가 없으면 경제논설을 쓰도록 해서 하루걸러 한 번씩 경제사설을 쓰곤 했다.

 

1992년 11월 17일 김영삼 대통령 후보가 'YS의 신경제정책 구상' 을 발표는 회의에 토론자로 참석해 금융실명제를 비롯한 경제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금융실명제가 추진될 때 까지 각종 토론회와 강연회에 참석하여 이 제도는 지하경제를 척결하는 지름길임을 역설했다.

 

일부 정책당국자는 기자가 금융실명제 실시의 숨은 공로자라고 평가했다. 개혁의 전도사 노릇을 하기 위해 금융실명제 시행 등 경제개혁과 개혁의 성공조건을 담은 '문민경제의 개혁'이란 책을 저술, 1993년 2월 25일 출판했다. 김 대통령 취임과 함께 발간된 이 책은 교보문고 등에서 베스트 셀러(비소설 부문) 1위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기자는 1991년 1월부터 1998년 8월 31일까지 崔澤滿 경제평론을 주 1회씩 쓰는 어쩌면 명예스런 논객 생활을 했다. 또 세제발전심의위원회 위원,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위원, 농업통상정책협의회 공동의장 등 각 부처 위원회 위원을 라는 바람에 경제정책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을 갖게되었다,

 

또한 '도설 한국경제', '평사원에서 대기업 정상에 오른 사랍들 등 단행본 5권을 쓴 것은 모두 '일복'의 덕분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기자는 80대 초반의 나이이지만 한 월간지에서 상임 편집위원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람과 긍지로 느꼈다.

 

2019년에는 교수신문 주필로 취임해서 주간지를 2년 동안 만들었고 2020년 부터 대한언론인회(언로인 단체)에서 발행하는 대한언론(월간지) 논설위원을 자리를 옮겨 사설을 쓰고 있다

 

제 4부 주요 평론과 기고문(起稿文)

 

우한 폐렴으로 강타당한 한국 경제

 

우한 폐렴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본격화되고 있다. 해외 관광객 감소와 내국인의 외출 자제 여파로 내수 시장이 직격탄을 맞은 데 이어 완성차 업체들이 일부 가동중단(셧다운)에 들어가는 등 제조업계 피해도 속출하고 있다. 우한 폐렴은 주로 수출에 영향을 준 사스나 피해가 내수에 집중된 메르스와 달리 수출과 내수 모두에 복합적으로 타격을 주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에다 우한 폐렴이란 악성 바이러스로 인해 한국경제는 치명타를 입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타이완과 함께 중국 경제 부침(浮沈)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 세계 경제에도 적잖이 여향을 줄 전망이다. 그래서 폐렴 이후 중국경제를 예의주시하자 읺을 수 없다. .

 

폐렴이후 중국경제

시진평 주석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악마라고 말했듯이 우한 폐렴은 중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분야는 관광 산업이다. 중국 정부의 국내외 단체 관광 금지 조치에 따라 주요 관광지들은 이미 폐쇄됐다. 최대 관광지인 베이징의 자금성을 비롯해 만리장성의 바다링(八達嶺)을 포함한 일부 구간이 폐쇄됐다. 시안의 인기 관광지인 진시황릉 병마용 등 지역마다 많은 사람이 몰리는 관광지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게다가 영화관을 비롯해 뮤지컬이나 음악회 등이 열리는 각종 공연장도 휴업에 들어갔다. 또 식당, 쇼핑몰, 백화점, 호텔 등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중국 국민들은 대부분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가계소비와 맞물린 서비스 산업이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우한 폐렴은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보다 중국 경제에 더욱 큰 피해를 입힐 것으로 전망된다. 베이징대 중국경제연구센터가 내놓은 2004년 보고서에 따르면 사스로 중국 경제의 피해액은 253억 달러에 달했다. 특히 관광산업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GDP 성장률은 1~2% 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추정됐었다.

 

각국 경제연구소도 중국의 GDP 성장률이 사스로 인해 1~2% 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분석했었다. 그런데 중국 서비스 산업은 사스 때보다 비중이 더욱 커졌기 때문에 이번 우한 폐렴에 따른 피해 규모는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중국 전문 연구기관인 플리넘(Plenum)우한 폐렴으로 인해 서비스 산업이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중국의 1분기 GDP 성장률이 최대 4% 포인트 하락한 2%대를 기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영국의 경제 분석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우한 폐렴으로 올해 중국 실질 GDP 성장률이 1%p 하락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의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얼라이언스 번스타인은 중국 정부가 3개월 내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제한다면 경제성장률은 0.8% 포인트, 9개월간 지속된다면 1.9% 포인트 하락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국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의 톈레이 황 애널리스트는 현재 중국은 대규모 재정적자 상태라면서 사스 때처럼 경기 부양을 시도할 여지가 줄었다고 지적했다. 미국 블룸버그통신도 우한 폐렴 사태로 미중 1단계 무역 합의가 무색한 결과를 낳게 될 수 있다면서 중국 정부가 우한 폐렴을 빠르게 통제하지 못하면 단기적으로 내수 시장이 침체되고, 중기적으로 전 산업이 타격을, 장기적으로 경기 침체에 빠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한 폐렴으로 자칫하면 시 주석의 중국몽이 일장춘몽이 될 수도 있다.

 

한국경제 성장률 하향 조정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우한 폐렴으로 인해 올해 1분기 국민총생산(GDP) 성장률이 0.8%에서 최대 1.7% 포인트 정도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 공장들의 가동률이 이번 주부터 빠르게 올라간다면 1분기에 최대 1.1% 포인트 정도 하락하는 데서 그칠 거다. 하지만 우한 폐렴으로 중국 제조업 가동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우리의 경우 최대 1.7% 포인트까지 하락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9일 미국 블룸버그에 따르면 세계 투자은행과 연구기관들은 올해 한국 수출 증가율 전망치는 전월보다 0.2%포인트 하향한 2,1% 수준이다. 제이피 모건 체이스는 1.8%, 소시에테 제네랄은 1.7%로 각각 2%를 밑돌 것으로 전망했다.


투자 관련 전망치도 하향 조정됐다. 블룸버그가 집계한 올해 한국의 투자 증가율 전망치 평균은 지난달 2.0%에서 이달 1.9%로 내려갔다. 가장 비관적으로 전망한 홍콩상하이은행(HSBC)0.8% 증가하는 데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수출 및 투자 전망치가 내려간 것은 1월 말부터 본격화된 신종 코로나 사태의 영향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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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도 하향 조정됐다. 영국 경제 분석기관인 캐피털 이코노믹스는 한국의 올해 GDP 성장률을 2.5%에서 1.5%로 대폭 낮췄다. 옥스퍼드대 산하 연구기관인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의 경우에도 한국 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2.2%에서 2.0%로 낮췄다. 한은도 당초 예상한 2.3% 경제성장률 달성이도 어렵다고 예상했다.

 

KDI 외국인 관광객 감소와 내국인의 외부활동 위축이 숙박·음식점업 등을 중심으로 한 서비스업 생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산 부품 수급에 차질이 발생할 경우 국내 광공업생산도 일부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현대경제연구원도 이날 보고서에서 신종 코로나 확산으로 인한 글로벌 경제 활동 위축 정도가 2003년 사스 당시보다 더 클 것으로 내다봤다. 경제성장의 동력(動力)인 수출과 투자 전망치가 내려간 것은 1월말부터 본격화된 신종 코로나 사태의 영향으로 분석된다'


세계 경제 성장률 전망치도 줄줄이 하락하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의 자회사인 무디스 애널리틱스는 올해 세계 경제의 성장률을 2.8%에서 2.5%0.3%포인트 낮췄다. 앞서 JP모건과 모건스탠리 등도 사태 장기화 시 세계 경제의 성장률을 0.30%포인트 낮췄고,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2.5%에서 2.3%0.2%포인트 낮췄다.

 

재계 관계자는 신종 코로나로 1분기 성장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추경을 한다면 빨리 하는 것이 경기 대응에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정 확대를 통한 경기 진작도 쉽지 않다. 기재부는 2102019회계연도 총세입·총세출 마감 결과를 내놓았다. 작년 국세 수입은 2935000억 원으로 세입 예산보다 13000억 원 적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이후 5년 만에 세수 펑크’(세수 결손)가 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남긴 재정 흑자로 2018년까지는 그럭저럭 세수 펑크를 내지 않았으나 지난해 적자로 경기활성화를 위한 재적 확대는 물론 선거 때 마다 표를 의식한 퍼주기 등 선심정책이 어렵게 되고 있다

 

본원적인 대책이 필요

문재인 정부는 세계 어느 국가도 시행하지 않은 소득주도 성장(소주성) 정책을 취임 초부터 추진했다. 소주성과 복지 증대가 문 정부의 정책 구호다. 소주성 정책의 골격은 일자리 확대와 비정규적은 정규직 전환, 그리고 최저임금 인상 등이고 복지정책은 의료보험 보장성 확대와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의 수혜 확대 등이다.

 

한국처럼 가계부채가 많은 나라에서 서민의 소득을 늘린다고 해서 소비가 늘지 않아서 소주성 정책을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정책이다. 복지정책은 재원 조달하기 어려워 이것마저 힘들다. 문 정부 초기에 재산세가 종합부동산세를 올리지 않고 초과 새수와 고용보험 및 전력기금의 여유자금을 최대한 활용해서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 돈으로 마구 쏟아내는 선심복지 재원을 마련할 수가 없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그러자 법인세 인상,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를 대폭 올렸지만 앞서 본 대로 5년 만에 최대의 세수 펑크를 내고 말았다. 정부 경제정책 실패에다 우한 폐렴이 강타하면서 경제 정책이 표류하고 있다. 대응책은 오직 한 길 밖에 없다. 소주성 정책과 선거 때마다 표를 의식한 선심성 복지정책을 폐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정의 최고 책임자는 경제 정책의 실패에 대해서 국민에게 사과하고 경제 각료를 전원 교체한 뒤 새로운 경제팀으로 하여금 신경제정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한다.(대한언론 3월)

 

소득주도 성장의 허구외 다수 (생략)

 

2020년 3월13일

추고 : 교정 편집이 완료 되지 안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