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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문태준 시인/효석

봉은 2020. 8. 21. 17:52

문태준 시인(앞줄 왼쪽)과 신문학기행 일행이 고향 마을 김천시 태화2리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소년 태준에게 그것은 늘 어려운 일이었다. 소는 소들끼리 놀라고 낮은 산, 들판에 풀어놓고 친구들과 깨벗고 놀 때가 좋았지. 소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는 긴 굴을 지나야만 했다. 굴 속은 무서웠다. 빛이 사라져 아무 것도 안보였으니까. 작대기 하나를 주워 들고 굴의 벽을 긁으며 걸어갔다. 그러면 조금 덜 무서워졌고 어둠 속에서 발을 내딛기도 한결 편했다.

세월이 흘러 소년 태준은 문태준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늘 어려운 일이었다. 저문 길 소를 몰고 굴을 지난다는 것은. 빨갛게 눈에 불을 켜는 짐승도 막상 어둠 앞에서는 주춤거린다.

작대기 하나를 벽면에 긁으면서 굴을 지나간다. 때로 이 묵직한 어둠의 굴은 얼마나 큰 항아리인가. 입구에 머리 박고 소리지르면 벽 부딪치며 소리 소리를 키우듯이 가끔 그 소리 나의 소리 아니듯이 상처받는 일 또한 그러하였다.

한 발 넓이의 이 굴에서 첨벙첨벙 개울에 빠지던 상한 무르팍 내 어릴 적 소처럼 길은 사랑할 채비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길 내는 법이 없다. 유혹당하는 마음조차 용서하고 보살펴야 이 굴 온전히 통과할 수 있다. 그래야 이 긴 어둠 어둠 아니다'.(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에 실은 '굴을 지나면서' 전문)

문태준 시인은 지난 7월 '신동아'와 한 인터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교과서 말고 다른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어릴 때 놀았던 것만 써도 되겠더라고요."

"자두 키워 자두 팔러 다니고 포도 키워 포도 팔러 다니고 누에 키우고 쇠죽 끓이느라" 바빠 흔한 문학책 한권 읽을 겨를이 없었던 1970년생 시골 소년 태준은 지금, 한국 문단과 언론이 큰 이견 없이 '김소월 백석 박목월 등 전통 서정시인의 계보를 잇는 대표 시인'이 되어 있다.

지난 21일 '신문학기행'에 참가한 부산의 독자들은 시 '굴을 지나면서'에 나오는 그 굴을 문태준 시인과 함께 걸어볼 수 있었다. 경북 김천시 봉산면 태화2리 문 시인의 고향마을이었다. 100m 남짓. 굴속은 깜깜했다. 굴 위로 경부선 철로가 지나가고 있었다. 철로가 마을을 끊으며 지나가자 마을 아랫쪽 윗쪽을 잇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 고교 졸업 때까지 교과서만 읽고 자란 시인


'신문학기행'에 참가한 부산의 독자들에게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문태준 시인(왼쪽). 그 때 기차가 지나갔다.

굴을 지나 반대쪽으로 나오자 딴 세상이다. 문 시인의 부모님 집이 있는 굴 아랫쪽은 그럭저럭 개명된 농촌마을이었는데 반대쪽은 고즈넉하고 무성한 야산 자락이다. 저수지인 재공못이 있고 외딴 재실이 서 있고 호두나무와 밤나무 감나무가 지천이다. 2년 반쯤 등산과 여행 담당기자를 하면서 '남들이 알게 될까 겁나는' 구석진 장소를 여러 군데 가보았지만, 이렇게 사람 손을 타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지러워져 가는 자연은 흔치 않다.

"어릴 때 풍경과 달라지긴 했지만 여긴 제가 고향에 내려오면 꼭 오는 곳이죠.…시골이 참 좋고 고향에만 오면 시로 쓸 거리가 꼭 생겨요. 동네 이야기를 모두 전해주시는 어머니가 계시고 큰 댓자로 누워있다가 산책도 할 수 있고." 그의 산책에서 이 굴을 통과하는 순간은 빠지지 않는다. 낯선 세계에서 온 방문자들의 눈에 이 굴은 그만의 비밀통로로 보였다. 현실의 세계와 시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통로. 만화영화 '이상한 나라의 폴'의 찌찌가 요술방망이를 두드리면 만들어지던 4차원 세계의 통로, 소설과 영화로 나온 '나니아 연대기'에서 아이들을 신비의 나라 나니아로 가게 해주던 마법의 옷장.

문태준의 시를 읽으며 생각했다. '그의 시들은 마치 감각의 왕국같구나. 왕국이라는 말이 싫으면 이렇게 말하자. 감각의 나라!' 그의 시들 속에는 살아 꿈틀대는 감각이 한결같다. 감히 흉내내기 힘들 정도로 생생하고, 살아있고, 뭉실뭉실거리고, 꼬물꼬물대며, 주룩주룩 내리는 감각은 그의 시를 살아 숨쉬는 존재로 보이게 한다.

고향 마을 어귀에서 그는 말했다. "포도 따고 자두 따서 내다 팔다가 명절이 되면 아버지가 짐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고 추풍령 이발소로 갔습니다. 머리를 짧게 깎고 자전거 뒤에 실려오면서 찬 바람을 맞는 느낌이 아주 좋았어요." 그에겐 30년이 다 되어가는 과거에 느낀 감각마저 지금 일처럼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 말을 할 때 그는 아이같았다.

고향이 그에게 감각만 키워줬을까. "대학교 때 방학이 되면 농삿일을 하러 고향에 와야 했는데 그때 시집을 2박스쯤 들고 와서 낮에 일하고 밤에 읽었지요. '문예중앙' 등단 통보도 고향 집에서 프로야구 보다가 받았습니다. 신경림 김용택 고재종…. 농촌시들이 좋았고 그런 시들이 쓰고 싶어졌던 거죠." 고향 김천은 그를 시인으로 키워주었고, 고향에서 잘 익힌 속 깊고 건강한 서정을 풀어내자 닳고 닳아 힘이 빠져 가던 서울의 문단이 "으악!"하고 비명을 질렀던 것이 문태준 시의 여정이었던 거다.

예술의 역사는 중앙의 기성 예술인들이 "저 친구 촌스럽지만 힘은 있네. 어디 애야?"라고 평하는 신진들에 의해, "세련됐지만 뭔가 힘을 잃은 듯해" 하는 평을 받는 중앙의 기성 예술인의 권력이 전복돼 온 과정의 연속이다.


# "내 시엔 내가 중심이 아니다"

그리고 고향. 태평리 고향집으로 들어서는 버스 안에서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 "저기 문을 열고 마당에 나오신 분은 가까운 집안어른이십니다. 그 집 딸 문혜진 시인이 이번에 제26회 김수영 문학상을 탔다고 축하해주는 플래카드를 마을 어귀에서 보셨죠? 문혜진은 제 사촌동생입니다. 저기 보이는 가매기식당. 고향의 동기동창들과 명절마다 모여 소주를 먹습니다. 11명이 태화초등 동기계를 하는데 이발사, 가구점 사장, 덤프트럭 기사, 이장 등 다양합니다. 저 포도밭은 우리 집 포도밭입니다. 제가 상속을 받게 되겠죠.(웃음) 그리고 이곳은 우리 동네의 집중 음주단속지역인데 얼마 전 만보 형님께서 벌금을 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고향과 튼튼하게 끈을 대고 있었다.

그리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 "별로 할 말이 없는데… 여러분 덕에 좋은 시 쓰고 책도 냈지요. 웅변도 잘 했고 공부도 잘 했고요. 법대나 상대 욕심도 있었지만 본인의 뜻을 존중했지요. 함께 자두 팔러 가고 포도 팔러 다니고… 좋은 문학상은 또 받으면 좋지요."(아버지 문광호 씨) "다들 여러분 덕분이지요. 태준이는 4녀1남의 셋짼데 5남매가 우애가 있고 부모한테 잘 해서 행복합니다. 어렵게 얻은 아들이지만 절대 오냐 오냐 키우지 않았어요. 동네사람들이 '아이구, 친엄마인께 다행이지'하는 말을 할 정도로 엄하게 길렀지요. 그래도 태준이 태몽은 아직 아무한테 말하지 않았어요."(어머니 김점순 여사)

마지막 여정 직지사에서 문 시인은 말했다. "우리 서정시에선 시적 화자가 월등히 우세한 경우가 많아요. 내가 주인이 되어 시적 대상을 장악하고 주도하는 형태지요. '내가 코스모스를 본다' 할 때 '나'가 코스모스의 주인이 되어 주종관계로 쓴다는 말인데 이렇게만 가서는 우리 문학이 더 커질 수 없을 것 같아요. 내가 쓰고 싶은 시는 나만 중심이 아니라 코스모스가 중심이 될 수 있는 시죠. 만물을 유연(有然:인연 속에 놓여있음)의 눈으로 보면 한쪽이 한쪽을 주도하거나 장악할 수가 없을 겁니다." "우리 문학, 우리의 시심이 아이처럼 천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최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학적 주제들이라는데, 고향에 와서 보니 시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 문태준 시인은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김천 성의중학, 김천고, 고려대 국문과를 나왔다. 1994년 '문에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으며 2004~2006년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문학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휩쓸면서 '김소월에서 시작한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문사마 시대'라 칭하기도 했다. 시힘 동인이며 불교방송 PD로 일하고 있다. 시집 '가재미' '맨발' 등. 겸손하고 넉넉한 품성으로 이번 신문학기행에서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문 시인의 모친은 부산에서 독자들이 문 시인을 보러 간다는 말을 듣고 떡을 해 마을회관에 돌리고 아침부터 마당을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