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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탄압 속에서 큰다"/최택만

봉은 2022. 5. 20. 12:53

"신문은 탄압 속에서 큰다"
조용중 국장의 말이다. 조 국장은  2002년 4월 주간 동안에 "러시아의 유일한 민간 TV인 NTV의 소유권이 2002년 월 정부 인사에게 넘어간 것은 NTV의 대주주인 블라디미르 구신스키(Vladimir Gusinsky)의 반정부 성향 때문이었다."고 기술했다
국영회사로 하여금 NTV를 인수하게 한 데는 구신스키의 재산 운영에 관계된 비리가 핑계였으나 그 바닥에는 구신스키가  전직 대통령인 옐친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정치색이 깔려 있었다. 누가 보아도 푸틴의 정치보복인 것이었다. 
올해 초 김대중 대통령이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한 데서 시작한 일련의 언론 목조르기는 대표적인 신문사주인 동아의 김병관 전 명예회장, 조선의 방상훈 사장 등 2명을 구속하는 것으로 한 고비를 넘겼다
구속 이전부터 세금포탈이라는 혐의 사실을 흘려 인민재판식 성토를 벌인 끝이라 앞으로의 수사를 통해서는 더욱 부도덕한 범법자로 만드는 작업이 치밀하게 계속될 것은 뻔하다.
개명한 문명국가가 대표적인 신문의 사주를 ‘도주와 증거인멸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구속 수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법적·도덕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무뢰한쯤으로 단죄하는 짓을 과연 생각해 낼 수 있겠는지. 참으로 권력의 무자비한 횡포에 전율을 금할 수 없다.
< 조용중/ 언론인,고려대·석좌교수 >


국장의 지론
위 글을 읽으면서 유혹과 폭력에 흔들리지 않은 언론인은 조용중 국장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조용중 편집 국장이다. 조 국장이 1967년 서울신문 재직 때 나는 사회부 차장 겸 법원 출입 팀장이었다. 그 해 7월 작곡가 윤이상 선생과 서독 유학생이 관련된 속칭 '동백림 사건'이 국내 언론이 크게 보도되고 있었다.  이 사건을 수사한 중앙정보부(현 국정원)는 이 사건을 각사 편집국장에게 먼저 브리핑을 하고 볍원 기자실에 와서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중앙정보부는 1967년 7월 8일부터 17일까지 7차에 걸쳐 보도 자료를 내놓았다. 그러나 조 편집국장은 사회부장이나 법조팀에게 한 번도 그 사건에 대해 "어떻게 보도하라"는 말이 없었다. 
조 국장은 각종 회의에서 "공정보도 못지 않게 시민의 명예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을 강조했다. 의사 표시의 자유나 언론 보도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특히 보도의 자유를 내세운 나머지 시민의 명예나 권리를 침해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특히 법조팀 기자는 대법원이 확정 판결이 나지도 않았는데 입건된 피고인을 죄인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법조팀 기자가 는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법어를 항상 생각하며서 기사를 쓸 것을 당부했다. 조 국장은 원칙론자이면서 인간미가 넘치는 대 기자다.
사회부 기자는 사건을 쫏다 보니 밤과 낮이 없다시피한다. 그러자니 피로가 풀리질 않는다. 그런데도 누군가 한 잔하자고 하면 그 유혹에 쉽게 손을 드는 편이다. 서울신문 뒤 무교동은 술집이 많다. 생맥주를 주로 팔던 '일번지'는 사회부 단골 술집이다.
법원 검찰청 출입기자와 경찰서 출입기자가 떼를 지워 가서 맥주잔을 비우고 있으면 가끔 조 국장이 합석해 푸짐하게 안주와 술을 시켜 주곤했다. 


'기자는 회사의 얼굴 "
조 국장은 부임하자 마차 편집국 운용에 관한 지침을 만들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특종상 제도다. 특종을 하면 상금을 주고 말던 것을 1급 2급 3급으로 특종을 나눠 1급은 호봉을 한급 올려주는 조치를 취했다. 업무국장들은 이를 반대했으나 기자는 '회사의 얼굴"이니 후한 상을 주어도 된다고 주장해서 관철했다고 한다. 또한 야근비와 출장비도 대폭 올렀다. 
조 국장은 기자들은 항상 공부해야 한다며 관훈클럽 등 각종 단체가 지원하는 출판 지원과 유학 지원 제도를 최대한 이용해서 해외로 나가 지식과 견문을 쌓의라고 당부했다. 국장의 권고에 따라 본인도 관훈클럽의 지원을 받아 인디아나대학에 1년 동안 연수했다.
해마다 수습기자들이 들어 오면 각부 부장들로 하여금 교육을 시키도록 제도화했고 일본어 강사를 초빙하여 일어 교육을 시켰다. 그 당시 일본 요미우리 신문이나 아사이 신문을 보면 일본에서 일어난 사회적 사건이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뒤에 발생하곤 했다. 일본 각급 학교에서 일어난 왕때 현상이나 폭력 등이 한국으로 전이되는 시간을 길지 않았다. 아니 아주 빨랐다. 그래서 일본 신문을 읽어야 한다.  


경호실 수사
청와대 경호실 보안과 통신계 직원이 뇌물을 받아 구속된 사건을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면서 비밀 영장으로 처리한 사건이 있었다. 경호실이 법원 영장담당 판사에게 부탁해서 비밀 영장으로 처리한 것이다. 비밀 영장으로 처리하면 구속자 대장(袋帳)에 이름이 없다. 장부에 이름이 빼는 것은 법원 출입 기자들이 모르게 하기 위해다.
해질 무렵 영장계 사무실에 가니 직원들은 자리에 없고 비일 구속 영장을 넣는 캐비닛은 열려 있어 이 맨 위에 있는 비밀 영장을 읽어 볼 수 있었다. 특종 기사 자료였다. 이 사건이 보도되자 청와대 경호실이 난리가 났다.   
청와대 경호실 보안과로 오라고 해서 갔다. 조사관인 듯한 사람이 다짜고짜로 그 기사를 어디서 어떻게 취재했는지 말하라는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신상에 좋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기자가 취재원을 보호하는 것은 하나의 불문율이다. 필자가 입을 열지 않으니 사회 부장과 조 국장까지 불렀다. 조사는 오후 늦게 까지 게속됐다. 다행스럽게 그 당시 장태화 서울신문 사장은 5,16 혁명 공약을 인쇄한 출판계 인사이다. 이 거사에 민간인으로 유일하게 참여했다. 장 사장은 국장과 사회 부장 그리고 기자가 경호실 수사를 받고 있는 것을 알고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선처해 달라고 부탁해서 풀려 난 것이다. 풀여 날 때 경호실 수사관이 "당신 참 운좋다"고 한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금주령
국장이 재직할 때 일어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그 당시 일과 후에는 무교동 술집으로 퇴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 기자들은 술을 많이 마신 것 같다. 
어느 부(部)나 저녁에 술먹기는 거의 같았다. 어느 날 밤 술먹고 회사로 들어가던 사회부 기자 한 명이 술을 먹고 편집국이 있는 3층으로 올라 가다가 계단에서 미끄러져 크게 다친 사건이 발생했다. (계단의 경사도가 높았다)
이 사건이 나자  조 국장은 사회부에 금주령을 내렸다, 한달 쯤지나 금주령을 해제를 하면서 "그동안 술을 마시지 못해서 힘들었지" 하면서 2차까지 간 일이 추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기자 생활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정정 보도 기사를 쓰는 것이다. 지금 기자도 마찬가지 이지만 정부부처나 사회단체는 신문사가 자신들에게 마음이 않드는 기사를 쓰면 신문윤리위원회에 제소를 한다.
만약 정정 보도 판정이 나면 신문에 그 내용을 소싱히 보도해야 한다. 이런 문제가 나도 조 국장은 해당 기자를 나무라지 않는다. 정정 기사를 쓰는 기자가 의기소침해 하고 있으면 "힘내라"며 격려해 주곤했다. 반면에 일부 선배는 꾸짓기도 했다. 조 국장은 역시 대 기자였다.

 

관훈저녈 6월호 원고
최택만 대한언론 논설위원, 전 서울신문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