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 혼자 차를 마실 때
길재(吉再, 1353-1419)
飄風不起 容膝易安
明月臨庭 獨步徐行
簷雨浪浪 或高枕而成夢
山雪飄飄 或烹茶而自酌
회오리 바람 일지 않아
좁은 방도 편안하다.
밝은 달빛 뜨락 비춰
홀로 더디 걸어보네.
처마에 비 떨어지면
베개 높여 꿈을 꾸고
산에 눈발 흩날릴 땐
차 끓여 홀로 따른다.
겨울의 산속 집에는 칼바람이 무시로 드나든다.
겨울밤 회오리 바람이라도 잔잔해지면,
무릎을 겨우 펼만한 좁은 방이지만[容膝] 편안하고 안온하다.
게다가 환한 달빛이 마당을 찾아오니
마음마저 환해져서 뜨락에 내려서서 혼자 가만히 산보한다.
혹 겨울비라도 내려 처마 끝에 빗물이 떨어지면,
그 소리를 음악 삼아 꿈나라로 들기도 한다.
하지만 산가(山家)의 겨울 운치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은 뭐니뭐니 해도 흰 눈이 펑펑 내려 쌓일 때,
그 눈을 녹여 찻물로 끓여
혼자 가만히 찻잔에 차를 따르는 바로 그 때가 아닐 수 없겠다.
문풍지에 흰 눈송이가 부딪쳐 쌓이고,
처마 끝에는 회오리 바람이 돌아나간다.
방안 화로에선 찻물이 보글보글 끓는다.
방안의 호롱불이 웃풍에 자꾸 흔들린다.
가만히 찻잔에 차를 따르니
훈김이 서려 움츠렸던 마음이 따뜻해진다.
무더위에 지친 여름날,
그저 한번 생각만으로도 더위가 간 곳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