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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 마을을 찾아서/ 효석 최택만

봉은 2020. 1. 30. 09:33

하회 마을

박완서 씨의 하회 마을 여행기를 보면 "20세기에서 16-17세기경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을 온 게 아닌가 하는 환각에 사로잡혔다"고 쓰여 있다. 오래전부터 이 마을을 한 번 가고 싶던 터라 궁금해서 더 여행기를 읽다가 "과연" 하고 말할만한 대목을 읽게 되었다.

 

"하회(河回) 마을은 그 한자풀이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낙동강 줄기가 마을을 태극 모양으로 휘돌고 있다. 마을을 휘감고 있는 강을 나룻배를 타고 건너면 이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이 있다. 언덕에서 하회 마을을 내려다보면 풍수지리설에 쥐뿔만큼도 아는 게 없는 주제에도 옛사람의 집터 잡는 안목에 감탄과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옛사람이 집터를 잡는다는 건 당장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몇 백 년을 두고 후손이 번창할 자리를 잡는다는 뜻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하회 마을을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에 불을 지핀다. 작가는 언덕에서 본 하회 마을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그 표현은 다분히 풍수지리적이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하회 마을은 낙동강에 떠 있는 한 송이의 커다란 연꽃처럼 보였다"고 작가는 서술하고 있다. 강위에 떠 있는 연꽃이란 표현은 분명 명당 자리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의 명재상 서애 유성룡의 종가가 있고 풍산 류씨의 종가 건물인 양진당이 있다.

 

명재상을 냈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 때도 전화를 입지 않았다. 대개 난리 때 전화를 피할 수 있는 곳은 깊은 산중에 있다. 그런데 하회 마을은 기름지고 넓은 들을 끼고 있다. 후세까지 널리 알려진 명당은 이 고을처럼 넉넉함이 뭇어나는 들을 끼고 있어야한다는 어느 풍수객의 말이 생각난다.

 

이 마을은 조선 전기 이후의 전통적인 가옥 모양, 즉 영남의 명기(名基)라는 풍수적 경관, 오랜 역사적 배경, 별신굿과 같은 민간전승 등이 잘 보존된 민속마을이다. 전국유수의 풍산 류씨 씨족 마을이다. 이 마을을 감싸 도는 화천(花川)은 낙동강의 상류이며 그 둘레에는 퇴적된 넓은 모래밭이 펼쳐지고, 그 서북쪽에는 울창한 노송이 들어서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하회마을은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2010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안동문화의 우수성을 세계가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세계역사 도시로서의 위상도 높아졌다. 한국의 역사마을에는 씨족마을, 읍성마을 등의 다양한 유형이 있으나 그 중에서 씨족마을은 전체 역사마을의 약 80%를 차지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마을 유형이다.


한국의 씨족마을은 조선시대(1392~1910) 초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전체 마을 중 약 80%를 점하게 되며,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 씨족마을이면서 양반마을인 하회와 양동은 모두 조선시대(1392~1910)에 양반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었던 한반도 동남부(영남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두 마을은 한국의 대표적인 마을 입지 유형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여름에 고온다습하고 겨울에 저온 건조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건물의 형태와 유교 예법에 입각한 가옥의 구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한국의 씨족마을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두 가지 전형인 개척 입양과 처가 입양이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전통적인 풍수의 원칙을 잘 지키고 있으며, 각각 한국 씨족마을 입지의 두 가지 전형인 강가 입지와 산기슭 입지의 대표적이고 우수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적, 문화적 성과물인 고문헌과 예술작품을 보관하고, 전통적인 가정의례를 준수하고 있다.

 

효석 최택만 전 서울신문 주필, 교수신문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