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토닉 러브
주님의 사랑은 인간의 플라토닉 러브보다 훨씬 높은 사랑입니다, 저는 승용차를 혼자서 타면 극동방송을 듣습니다. 오늘 아침에 볼일이 있어 운행 중 주 찬양예배 교회 담임목사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목사의 기도를 듣다가 플라토닉 러브가 생각났습니다. 이 러브는 감성적인 욕망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연인의 인격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신적인 사랑, 이상주의적이고 관념론적이며 순수한 정신적 사랑을 뜻한다고 합니다 .
그런데 플라토닉 러브라는 이 단어는 플라톤의 이름과는 관련이 있지만, 그의 사상과는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플라토닉러브'란 말이 왜 생겨났을까?
그것은 플라톤 철학이 갖는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에 대한 유추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의 사랑은 '특수한 형태로서의 육체가 배제된, 그야말로 가장 정신적이고도 순수한 사랑', 즉 플라토닉 러브라는 언어를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이 용어는 플라톤이 철학에 대해 취한 태도의 한 방식이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플라톤은 철학 자체를 아카페의 한 방식으로 보았고, 본질상 사랑으로 파악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플라토닉 러브'의 심오한 의미는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단순히 관능적인 욕구를 억눌러 억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욕구를 고양된 형태로 넘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아름다움 그 자체를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노년에 들어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의 시 속의 사랑은 "육체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아름다움 자체를 얻으려는 사고(思考)"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가 그처럼 심요한 단계로 발전하면서 플라토닉 러브 뿐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끝임없는 존경과 기도가 항상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질병(코로나)으로 부터의 해방은 기도를 통해서 얻를 수 있을 것입니다
2020년 2월 25일
최택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