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TV에서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를 출연시켜 젊은 시절에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사람을 찾아내는 프로가 있다.나는 이 프로를 볼 때마다 늘 회상되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그분은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여자 선생님이다. 이 선생님은 내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해 주신 분이다. 나는 군청 소재지의 중학교에 다녔는데 시골 학교가 모두 그런지는 모르지만, 藝體能 쪽 선생님이 없었고 그래서 그 방면의 공부는 전혀 할 수가 없었다..
나와 몇 친구는 서울로 진학하기로 했기 때문에 예능과목이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외지로 갈 학생들이 교장 선생님에게 음악 선생님을 모셔 달라고 건의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우리들 건의를 무시하시지 않고 노력해 보겠노라고 반승낙을 해주셨다. 다행히 같은 읍내 소재의 여자 중학교에서 음악 선생님을 한 분 모시게 되었다..
이 선생님은 그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교사 생활을 시작한 분이니 22~23세 정도 되었을 것이고 우리는 15~16세였으니 대략 7살 차이는 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자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았다. 음악 시간 때면 우리 교실로 풍금을 옮겨 놓고 나서는 선생님께서 앉을 의자에 침을 탁 뱉어 놓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손수건으로 훔치고 자연스레 앉던 선생님이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자 표정이 굳어지셨지만 별다른 말 없이 손수건으로 닦고 앉곤 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고 월말시험 때가 되니 "야,우리 시험지에 답을 일체 써넣지 않고 백지(白紙)상태로 제출하는 백지동맹 한번 하자"는 뚱딴지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음악시험 시간이 되어 문제지가 배포되고 들여다보고 있는데 벌써 복도에 슬금슬금 나가는 패거리들이 있지 않은가. 나는 못 본 채 문제를 읽고 있으려니 내 옆 창가에 와서 나를 계속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다. 나올래, 안 나올래를 결정하라는 싸인이었다.
그래서 결연히 시험지를 덮어 버리고 교실 문을 열고 나오니 그것을 계기로 하나, 둘 나오는 친구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문제가 쉬워서 쉽게 답을 쓰고 나오는 것 처럼 늠늠하게... 이런 큰 사건이 일어났으니 겁은 났으나 비장한 각오로 사태진전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주모자를 찾아서 엄하게 다스릴줄 알았는데 음악 선생님께서 사표를 쓰고 출근을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 버린 것이다.
선생님이 "자기의 부덕 때문" 이라며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사태를 진정시킨 듯했다.미안하고 죄송하기 짝이 없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시작한 교직 생활이 제자들의 백지동맹이란 맹랑한 사태에 봉착했으니 정신적 충격을 컸을 것이다..
더욱더 미안한 것은 떠나시면서 음악시험 채점을 해놓고 가셨는데 학생들의 학년 평균성적에 따라 후하게 점수를 주신 것이다. 그 선생님으로부터 약 3개월간 음악공부를 한 것이 중학교 3년간 음악 공부의 전부가 되어 버린 채로 나는 서울 모 고등학교에 응시했다. 음악시험지를 보니 악보를 보고 도레미파 기본음을 적으라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백지동맹으로 학교를 그만두신 선생님께서 석달 동안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 중의 하나였다
며칠 후 합격자 명단을 보러 갔더니 내 이름이 붙어는 것이었다.읍 단위의 시골 중학교를 나온 촌놈이 소위 일류 고등학교에 붙었으니 부모님과 모교에는 영광을 안겨준 셈이 되었다 반면에 10대들의 '이유 없는 반항의식'과 백지동맹에서 비롯된 철없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는 꿈 많은 선생님에게는 깊은 상처를 안겨 드리고 말았다
이것이 우리 가슴에도 두고두고 잊지 못할 회한으로 남아 있게 되었고 우리가 중년이 되었을 무렵 늦었지만, 선생님께 사죄를 해야한다는 생각에서 선생님의 행방을 백방으로 알아봤으나 알길이 없었다 노년에 접어들면서는 나의 상처는 더 커지고 있다. 소년 시절의호기심이 중년의 회한으로, 노년의 죄의식으로 변해간다.
선생님의 선하고 단아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정경숙 선생님 어디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