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나희덕과 광주 · 담양
시골 옛 작업실 · 돌담길, 학교 연구실 창밖 풍경
눈에 들어오는 자연과 자잘한 일상의 되새김질
별것 아닌 것에서 생명을 찾다
담양 지실마을에서 신문학기행 일행이 나희덕 시인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광주에 산 지 6년, 나희덕 시인은 '광주댁'이 다 된 것 같았다.
"제 시집 '사라진 손바닥'에 '겨울 아침'이라는 시가 있어요. 한번 읽어볼게요.(우리는 그 때 흔들리는 문학기행 버스 안에 있었다.) '어치 울음에 깨는 날이 잦아졌다/눈 부비며 쌀을 씻는 동안/어치는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친다//어미새가 소나무에서 단풍나무로 내려앉자/허공 속의 길을 따라/여남은 새끼들이 푸르르 단풍나무로 내려온다/어미새가 다시 소나무로 날아오르자/…//저 텃새처럼 살 수 있다고/이렇게 새끼들을 기르며 살고 있다고./쌀 씻다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창밖의 날개 소리가 시간을 가르치는 아침//소나무와 단풍나무 사이에서 한 생애가 가리라'."
짝짝짝짝! "저기 오른쪽 차창밖으로 한 동짜리 아파트가 보이죠. 우리 집이에요.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산이 보여요.(무등산 자락이다) 어느 겨울 아침에 쌀을 씻다가 본 풍경을 쓴 거예요."
왜 시인은 '저 새처럼'이 아니고 '저 텃새처럼 살 수 있다고'라 했을까, 하는 질문을 그 때는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버스가 이내 움직였기 때문이다. "왼쪽 창밖으로…"라고 그가 말하며 손짓을 하기에 그 쪽을 보니 건물벽에 '행복재활원'이라고 큰 글씨가 씌어 있었다. 맞은 편에는 '창억떡집'이 있었고 둘 사이에는 '배고픈다리'(이 동네의 다리 이름인데 백오푼다리라고 써놓은 간판도 있었다)가 있다. '사라진 손바닥' 시집에 수록된 시 '행복재활원 지나 배고픈다리 지나'가 탄생한 현장이다.
# '뿌리에게'의 시인이 새로 뿌리내린 곳 광주
그렇게 '신문학기행' 일행은 나 시인이 문예창작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조선대에도 갔다. 희고 긴 본관 건물로 유명한 바로 그 조선대다. '…사람보다 절벽을 보고 사는 날이 많아진 저는/바윗결에서 숨은 집을 찾아내거나/어린 나무를 발견하기도 합니다/잊혀진 얼굴도, 모르는 짐승도 저 안에 있습니다/…이젠 어둠 속에서도 잘 들립니다/밤마다 절벽 위를 걸어다니는 소리,/그가 누군지 다음날 절벽을 보면 알 것 같습니다' 이 시가 태어난 곳은 '나 교수'의 연구실이다. 연구실 창밖에 절벽이 코앞이다. 교수연구동 건물을 짓느라 산을 깎으면서 생긴 절벽을 보며 "집을 왔다갔다 하며 새벽 1시까지도 머무르곤 하는" 연구실에서 '옆구리 절벽'이라는 이 시를 썼다.
조선대와 무등산을 이어주는 산자락 등산로에서는 자연과 대화하며 쓴 '가을이었다'가 나왔고 무등산 너덜겅을 몇날 며칠 본 뒤에는 '그는 먹구름 속에 들어 계셨다'가 잉태됐다. "6년 전 아무 연고가 없던 광주에 내려왔을 때 아는 이도 없고 친구도 없고 사실 외로웠어요. 무등산을 자주 오르내리면서 자연과 대화가 늘었죠. '사라진 손바닥'에는 그렇게 쓴 시들이 많아요." 그가 이제는 이렇게 말한다. "전라도 사람들은 정말 정이 많아서 남인 저를 피붙이처럼 대해줬는데 처음엔 부담스러울 정도였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나도 이 분들처럼 변해서 멀리서 손님이 오면 정을 막 쏟게 돼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보내고 나서 마음이 불편해요."
나희덕 시인이 담양 지실마을의 옛 작업실 앞 돌담 앞에 섰다. 지실마을에는 이렇게 탐스러운 돌담길이 제법 남아 있다. 조봉권 기자
시인이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신문학기행'은 '알뜰살뜰 요모조모'라는 측면에서 단연 최고 수준이었다. 일반 독자 40여 명으로 이뤄진 일행은 폐가처럼 변해버린 시인의 예전 시골 작업실로, 오래된 작은 마을의 돌담길로, "여기까지 오셨으니 꼭 보셔야 할 것 같은" 소쇄헌과 명옥헌으로, "이곳까지 오셨으니 꼭 드셔야 할" 흑두부집과 담양 돼지갈비집으로 샅샅이 누비고 다닐 수 있었다. 행렬의 맨앞에는 언제나 특급 담양·광주 문학기행 가이드 나희덕이 있었다.
나희덕 시인은 '뿌리에게'라는 시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첫 시집 제목도 '뿌리에게'이다. 시인은 광주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듯했다. '저 텃새처럼 살 수 있다고'라고 '광주댁'처럼 말하면서.
# 담양, 나희덕을 감싸주는 땅
광주 지척에 담양이 있다. 담양을 시인은 사랑했다. '담양이나 창평 어디쯤 방을 얻어/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방을 얻다' 첫머리)
시인은 실제로 한 2년 담양 지실마을에 집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며 시를 썼다. 지실은 옛 돌담이 잘 남아있는 작은 시골마을. 지실마을 작업실에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2년쯤 전 그곳을 나왔다. "조금만 돌보지 않으면 풀들이 웃자라고 작업실 처마에 말벌들이 자꾸 집을 지었어요. 마치 이 집의 관리인으로 취직한 것 같았어요."(웃음) 말벌에게 쏘이기도 했고, 말벌집을 치우기 위해 동네사람들이 알려준 대로 119에 신고를 해 엄청나게 큰 소방차가 이 작은 마을의 이 작은 말벌집을 떼내기 위해 소동처럼 출동한 광경도 봤다. 그 때 시인은 말벌의 육각형 집을 자세히 볼 수 있었고 "말벌이 보면 내가 침입자겠구나"하는 생각도 했다. 지실마을 옛 작업실은 지금은 폐가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마을 고샅길을 걷고 시인의 손길이 닿았던 집 마당에 들자 시인 나희덕은 점점 친근해졌다.
이번 문학기행이 나희덕 시인의 연구실이나 옛 작업실처럼 작고 사소한 공간만 다닌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때보다 일정이 풍성한 편이었다. 무등산 입구의 고찰 원효사 절마당, 저 유명한 소쇄원, 한때 황지우 시인이 그 앞집에 살았던 품격 높은 정자 명옥헌을 돌았고 담양의 명품 메타세퀘이어 길을 넋 놓고 거닐기도 했다. '평상이 있는 국수집'들과 순하고 예쁜 숲길이 어이지는 관방재 유원지에서 담양 사람들이 노니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평화로움의 절정을 보았다. 그런데 왜 나희덕 시인의 작업실과 그가 살고 있는 '배고픈다리' 동네의 모습같은 작고 사소한 풍경이 더 또렷히 기억에 남는가.
나희덕 시인은 따로 문학강연이나 시론 이야기 같은 순서를 마련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지나온 흔적을 보여줬고 일행을 안내하며 함께 놀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모습 자체에 나희덕의 문학강연은 다 들어 있었다. 헤어질 때 쯤 그는 이런 말을 들려줬다. "저의 연구실이나 낡은 옛 작업실처럼 하찮은 곳까지 다니느라 힘들지 않으셨나요. 과연 이런 곳까지 보여드려야 하나 고민도 했어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별 것도 아닌 것, 별 곳도 아닌 곳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끄집어 내서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문학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저의 시 또한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바라고요."
대부분 생활 속에서 나왔기에 처음엔 순하게만 읽히다가, 되새김질하듯 몇번 곱씹어 읽으면 어느 순간 환하게 피어나 뇌리에 박히는 나희덕 시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 나희덕 시인은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국문과에 들어가 박사과정까지 밟았다. 그러니까 충청도에서 태어났고 20년 넘게 서울 생활을 한 것이다. 6년전 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가 되면서 광주로 내려가 살고 있다.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뿌리에게'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안도현 정일근 최영철 문태준 시인 등과 함께 '시힘' 동인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평범한 것들 속에서 아름다운 것, 의미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데 탁월하다. 시집을 곁에 두고 되새김질하듯 읽으면 맛이 자꾸 깊어지는 쪽의 시들이다.
시집 '뿌리에게'(창비·199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창비·1994) '어두워진다는 것'(창비·2001) '그곳이 멀지 않다'(민음사·1997, 문학동네·2004) '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사·2004).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창비·2003) 등을 펴냈다.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