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년 전, '내'가 열 살 안팎인 때의 일이다. 청엽정(靑葉町 : 동리 이름에 '정'이 붙는 것은 일제 시대이기 때문이다.)을 연화봉(蓮花峰)이라고 부를 무렵, 그 동네에는 인심이 후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세력도 있는 오 생원(吳生員)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오 생원의 집에는 살룡이라는 벙어리 하인이 있었는데, 볼품없는 외모에 흉한 걸음을 걷는 그는 마음이 진실하고 충성스러우며 부지런해서 주인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한편, 버릇이 없고 성격이 고약한 주인 아들은 삼룡이를 괴롭히나 삼룡이는 언제나 참는다.
주인 아들은 현숙한 처녀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매사에 훌륭한 신부와 비교되자 열등감에 사로잡힌 주인 아들은 자기 아내를 미워한다. 삼룡이는 그것을 안타까워 한다.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삼룡이에게 새아씨는 부시 쌈지를 하나 만들어 주었는데, 그것이 말썽이 되어 삼룡이는 주인 아들에게 죽도록 맞은 뒤 내쫓긴다. 어느 날, 삼룡이는 주인 아씨가 중병(重病)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걱정 끝에 그 방에 들어갔다가 들켜서 오해를 받고는 매를 맞고 쫓겨난다.
그날 밤, 그 집에 불이 난다. 불길 속으로 뛰어든 삼룡이는 주인을 구출해 낸 다음 다시 불길로 들어가, 타 죽을 작정으로 불속에 누워 있는 새아씨를 찾아내어 안고 지붕으로 올라간다. 삼룡이는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평화롭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1925년 <여명(黎明)>에 발표된 단편소설. 신체적 불구와 함께 신분적인 멸시를 받는 한 인간의 순수하고 강렬한 사랑을 통해, 고결한 사랑의 가치와 독자적인 인간임을 자각하는 과정이 불의 이미지 속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불속에 뛰어들어 고결한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 죽음에 의해 일체의 고뇌가 사라지고 예속적인 관계가 청산되는 극한적 결말 처리 방법이다. 삼룡이가 주인 아씨를 안은 채 웃으면서 죽는,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한 순간이나만 이루는 결말 처리는 이 작품을 낭만적인 소설로 읽히게 하는 것이다.
나도향에게 이 작품은 초기의 감상주의를 극복하고 인간의 진실한 애정과 그것이 주는 인간 구원의 의미를 탐색한 작품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돈과 신분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결정적인 약점을 지닌 벙어리 삼룡이란 인물이 상전의 아씨에게 품은 연모의 정으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반항으로 전환되는 갈등을 겪으면서 이 작품은 파국을 맞는다. 다시 말해서 진실한 애정과 그것이 주는 인간 구원의 의미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의미가 있다. 이 작품은 1920년 나운규에 의해 영화화 되기도 했다.
2020년 10월 16일
최택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