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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추억/오늘의 글

봉은 2020. 11. 8. 07:01

첫사랑의 추억을 대부분의 사람이 갖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첫사랑의 추억을 '오늘의 글'로 올립니다

 

"잘 지내지요, 선배는 참 좋은 사람이야" "저 결혼해요"

"그래? 넌 괜찮은 여잔걸"

 

돌아서니 찬바람이 휑하니 몰아쳤고, 겨울은 깊어져 있었다. 후줄근한 걸음, 시린 뒷모습이 행여 그 여자를 심란스럽게 만들까 보아 나는 애써 당당하게 걸었다. 하지만 시시덕거리며 밀려오는 사람들을 헤치고 골목길을 꺾어 들면서 발과 몸뚱이는 따로따로 비척거리기 시작했다

 

바닥 모를 아득함으로 가슴이 아려 왔고,맑은 정신이 더 없이 부담스럽게 느껴쪘다 나는 진탕 퍼마시지 않고는 버텨낼 수가 없었다 그날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침에 쓰린 속 탓에 잠이 깼다

겨우 몸을 일으켜 자리 끼를 마신 후 다시 널브러졌다 몇 시나 됐을까 바깥은 여전히 희끄무레한 기색이었다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에서는 웬 여자가 펑펑 눈이 온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눈! 눈이 온다는 것이었다. 노래가 나왔다. 흐느끼는 목소리로

 

"눈이 내리네 당신이 가버린 지금/눈이 내리네 외로워지는 내 마음/

꿈에 그리던 따뜻한 미소가/흰 눈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네"

 

아, 우리는 얼마나 애타게 눈을 기다려 왔던가 눈 내리는 적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촌뜨기인 나는 눈 쌓인 고궁의 뒷담 길을 얼마나 걷고 싶어 했던가 그런데 지금 그 녀는 지금 내 곁을 떠나버린 것이다'

 

눈은 내리고, 그녀은 떠나고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감정의 격랑이 나의 마음을 할퀴었다 물론 으레 첫사랑이 그렇듯이 눈부시게 열려가던 새로세계는 동화(童話)처럼 아름답게 끝나지 않는다'

 

대학 3학년이 끝나갈 즈음 경제연구회를 만들어 정부의 경제정책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어 풀려나자 그녀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 후부터 그녀는 늘 부재중(不在中) 이었다 전화도,편지도 요괴가 산다는 깊은 수렁에 잠긴 듯 도무지 되돌아올 줄을 몰랐다.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이가림의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창작과비평사)

 

나는 이 시를 읽은 다음부터 유리창이

보이면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곤 했었다,

 

효석 최택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