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서산으로 붉은 해가 지고 노을의 마지막 빛인 푸르스레한 채색이 하늘을 덥고 있었다. 나는 힘겨운 발걸음을 재촉하며 쉬지 않고 도봉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군데군데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도봉산 내려오는 발자취에는 여름철 진녹색에 대한 향수를 일으키었다. 인기척이 없을 즈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한 여인이 나처럼 무거운 듯한 발걸음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내 앞을 스쳐지나 갔다. 프르스레한 노을이 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려는 것 같았다. 나도 뒤지지 않으려고 그녀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앞섰다. 이런 일이 몇 번 계속되었다.
"같이 내려가죠"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발길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우수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이 같이 걸었다.
"산을 좋아하시나 봐요"
내가 다시 입을 열자 그녀가 처음 입을 열었다.
"산에 오면 공기가 좋아서 ..."
말을 채 이어가지 않았다. 수줍음을 타는 듯했다.
산에서 내려와 버스를 타기 전 나는 그녀에게 명함을 주며 다음번 산행을 같이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달 후엔가,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음 주 산행 어떠세요"
청아한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가슴이 콩닥콩닥 거렸다 .긴말도 못하고
"네, 어디서 뵙죠"
" 산 입구에 머그 앤 스푼이란 작은 커피집 아시죠"
"네, 압니다 그날 뵙죠"
우리의 데이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그녀는 내가 전혀 모르는 무수골을 지나 방학동으로 산행을 하자고 했다. 무수골 길은 조그마한 산길이라 호젓했고 아기자기한 느낌이 드는 길이었다.
방학동 길은 노끈으로 짜여진 멍석이 깔려있었다. 촉촉한 촉감이 발길을 간지럽히고 병풍처럼 쳐있는 흙담에서는 온기가 돌아 오랜 벗과 걷는 듯했다. 길 옆 조그마한 도랑에서는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그녀를 연상케 하는 길이었다.
"풍광이 아름다운 길이네요"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입가에 웃음이 피었다. 몇번 산행을 하면서 그녀가 화가이고 다도(茶道)에도 조예가 깊은 것을 알았다' 문학에 관심이 많고 고전음악은 모두 섭렵한 것 같았다.
날아 갈 수록 우리의 대화는 풍요롭고 화제가 흐르는 강물처럼 바뀌었다. 산행을 하면서 대화를 나눈지 7개월 되는 어느날, 나는 그녀에게 "그대와 하나가 되어" 라는 제목의 시 한 수가 쓰여진 사랑 고백 편지를 슬며시 주었다. 그 편지는 우리 사랑의 씨앗이 되어 움이트고 열매를 맺는 전령사가 되어갔다.
그대와 하나가 되어
기다림으로 많은 날들을 접어
무한대 사랑이 우리안에 머물 때
내 마음 적어 그대에게 보내며
그대 모습 받아 곱게 간직해 본다.
< 중략 >
만약 서로 아픔이 있다면
반반씩 나누고 초라해진
모습이 있다면 눈물로
지우면서 홀로서기가 아닌
그대와 하나가 되어 빈공간의
허전함을 우리의 사랑의 힘으로
가득 메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