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추억
"잘 지내지요, 선배는 참 좋은 사람이야" "저 결혼해요"
"그래? 넌 괜찮은 여잔걸"
돌아서니 찬바람이 휑하니 몰아쳤고, 겨울은 깊어져 있었다.
후줄근한 걸음, 시린 뒷모습이 행여 그 여자를 심란스럽게 만들까 보아
나는 애써 당당하게 걸었다 하지만 시시덕거리며 밀려오는 사람들을
헤치고 골목길을 꺾어 들면서 발과 몸뚱이는 따로따로 비척거리기 시작하였다
바닥 모를 아득함으로 가슴이 아려 왔고,맑은 정신이 더 없이 부담스럽게
느껴쪘다 나는 진탕 퍼마시지 않고는 버텨낼 수가 없었다
그날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침에 쓰린 속 탓에 잠이 깼다
겨우 몸을 일으켜 자리 끼를 마신 후 다시 널브러졌다
몇 시나 됐을까 바깥은 여전히 희끄무레한 기색이었다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에서는 웬 방정맞은 여자가 펑펑 눈이 온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눈! 눈이 온다는 것이었다 노래가 나왔다. 흐느끼는 목소리로
"눈이 내리네 당신이 가버린 지금/눈이 내리네 외로워지는 내 마음/
꿈에 그리던 따뜻한 미소가/흰 눈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네/
하얀 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그 모습/애처로이 불러도 하얀 눈만 내리네"
아, 우리는 얼마나 애타게 눈을 기다려 왔던
눈 쌓인 덕수궁 뒷담 길을 얼마나 걷고 싶어 했던가
그런데 지금 그 녀는 지금 내 곁을 떠나버린 것이다
눈은 내리고, 그녀은 떠나고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감정의 격랑이
나의 마음을 할퀴었다 물론 으레 첫사랑이 그렇듯이 눈부시게 열려가던 새로운
세계는 동화(童話)처럼 아름답게 끝나지 않는다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낮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중략......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이가림의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창작과비평사)
나는 이 시를 읽은 다음부터 유리창이 보이면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곤 한다
버스의 차창과 강의실 유리창에까지 이마를 갖다 댄다
그러면 선뜩한 차가움이 날카롭게 파고들어 내 의식은 일제히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곤 한다 눈내리는 계절은 더욱 그렇다
나는 언제 이 버릇을 버릴까
나는 정말 바보 같다
효석 최택만